ⓒ 그림책『고향의 봄』그림 김동성(2013년, 파랑새)
동원이원수선생
나의 아내 최순애
이원수의 아내이자 아동문학가, 최순애 이원수 선생은 <고향의 봄>이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후 전국의 많은 어린이들과 편지를 통해 서로 친구가 되었다.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문학을 통해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어린 소년의 정신세계는 그만큼 더 넓어지고 커졌다. 그 중에서 이원수 선생의 평생의 동반자가 된 최순애라는 동요 작가와의 만남은 특별한 것이었다.

최순애는 열 세살의 나이로 <오빠생각>이라는 동요를 지어 같은 [어린이] 잡지에 실렸으며 선생과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인천에 살았던 최순애는 오빠가 [개벽]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며, 또한 집도 부자여서 선생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진을 주고 받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현실적인 만남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빠가 이원수와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지은 <오빠생각>이란 노래를 부르며 이원수 선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래로 통하고 마음으로 통하는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젊은 아동문학가들의 모임인 동인회 <기쁨사>의 회원으로도 같이 활동했다.
선생께서 함안 금융조합 시절에 '반일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살이를 할 때도 최순애는 어둡고 힘든 세상에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며 고통을 함께 했다.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자신의 문학에 대한 꿈을 접고 선생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이원수 선생은 최순애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훌륭한 아동문학을 하겠다는 맹세를 했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문학을 통해 인연을 맺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켜 평생 문학활동에 바친 아름다운 인연이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 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댑싸리나무
한 아름
고염나무
한 포기
뜰앞에서
조으는
암탉 한 마리
우리 집 마당은
고요합니다.

서리 맞아
시들은
풋고추 하나
햇볕 보고
다시 사는
호박순 아기
우리 집 가을은
고요합니다.
그림자 그림자

밤중에 나의 동무 벽에 그림자
낙엽소리 우수수 밤이 깊도록
잠 안 자고 너도 너도 일을 하누나

버선 깁는 그림자 나의 그림자
아기 버선 한 짝에 밤이 깊어도
발벗고 추워 떨던 어린 내 동생
좋아 날뛸 생각에 잠도 안 오네
진주 가는 낮차는 느림보 되서
열두 점 떼엥, 뗑, 쳐도 안 온다.
정거장 손님은 할머니 손님
기다리다 졸려서 고개가 꼬-박.

진주 가는 낮차는 느림보 되서
하나, 둘, **정 해도 안 온다.
기차 탈 손님, 아기 손님은
흙에 앉어 띠! 띠!
기차 그림 그린다.

철로뚝엔 아지랑이, 노랑나비
함께 얼려 춤추네, 꽃도 피었네.
낮차는 오다 오다 한눈 파나봐.
철뚝 담 꽃이 고와 한눈 파나봐.

(**은 영인본에 보이지 않는 부분)
따스한 봄 볕,
마루 끝에 고양이가
사르르 조을고

살랑 살랑 봄바람
거름마 배는 울애기
머리카락 날린다.

장다리밭 꽃 밑에
병아리, 병아리,
삐요 삐요 삐요요··· ···
엄마 따라 조루루
나들이 가네.
오!
어머니가 이불을 펴신다.
어머니 큰 이불은 파아란 바다,
우리 작은 이불은 예쁜 꽃동산.

베개는 하얀 배,
바다에다 띄우고
우리 모두 꽃동산에
뒹굴자
해가 지면 별애기 놀러나와도
울애기는 엄마 품에 잠이 들지요.

별애기는 눈 감고 잠이 들지요.
해가 뜨면 울애기 놀라나와도

애기하고 별하고 서로 만나서
함께 웃고 노는 게 보고 싶어요.
최순애 여사의 작품에 대하여 "우리는 '뜸북 뜸북 뜸북새 /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 숲에서 울 때'로 시작하는 동요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 <오빠 생각> 을 쓴 동요 시인이 70여 년 전 12살의 어린 소녀 최순애 (1914~1998) 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동요 <고향의 봄> 을 쓴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부인 최순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순애는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에 이원수보다 한 해 먼저 동요가 입선될 정도로 동요에 관심이 많았고 6.25 전까지 가끔씩 동요를 발표한 엄연한 동요 시인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시들은 몇 편 되지 않지만 동시집을 한 권 내려고 준비한 원고가 6.25 때 아깝게 불탔다 하니 적지 않은 시를 쓴 셈이다.

초기 <어린이> 잡지를 뒤져보면 최순애 이름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문제 풀이 당선자에서부터 여러 편의 동요, 독자 담화실에 독자 투고까지 할 정도로 최순애는 <어린이>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1925년 9월 <어린이>(3권 9호) 동요 선외 가작란에는 최순애, 이원수 이름이 나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최순애는 동요 <오빠 생각>이 입선되고 이원수는 다음해 4월에 동요 <고향의 봄> 이 입선된다. 입선 당시에 최순애는 12살이었고 이원수는 16살이었다.

수원의 최순애와 마산의 이원수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이렇게 <어린이>잡지를 통해서였지만 둘이 좀더 가까워 질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어린이 동요 시인이었던 윤석중의 힘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윤석중은 그 당시 서울에 살면서 글동무를 모아 '기쁨사'라는 모임을 만들고 <기쁨>이란 등사판 잡지와 <굴렁쇠> 라는 회람 잡지를 만들었는데 <어린이>로 만난 많은 글동무들이 서로 연락하며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쁨사'의 동인으로는 서울의 윤석중, 수원의 최순애, 마산의 이원수를 비롯하여 동요 <봄편지>로 유명한 부산의 꼽추 시인 서덕출, <중중 떼떼중>으로 유명한 월북 동요 시인 윤복진, 그 밖에 신고송, 이정구, 천정철 같은 어린 동요 시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굴렁쇠>라는 회람 잡지를 낸 것이다. <굴렁쇠>는 그 이름처럼 전국을 굴러다니는 잡지였다. 먼저 윤석중이 표지를 만들고 동요를 쓴 다음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우편으로 보내면 다른 사람들이 다시 동요를 쓰고 글을 써서 다음 사람에게 보내는 잡지다. 이렇게 전국을 다 돌아오면 한 권의 잡지가 된다.(윤석중, <어린이와 한평생>, 범양사, 1985) 최순애와 이원수는 이런 활동으로 그 우정을 쌓아서 1936년 6월 6일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최순애가 이렇게 자유롭게 <어린이>애독자가 되고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 분위기도 한몫 한 것 같다. 최순애의 부모님은 기독교 신자로 개방된 분위기 속에서 자식들을 키웠고(따님 이정옥 증언) 또 아버지 최경우는 소파 방정환의 숭배자였다고 한다.(윤석중, 같은 글) 또 오빠 최영주(=최신복)도 소파 방정환의 열렬한 숭배자로 수원에서 화성 소년회를 이끌며 해마다 방정환을 초대하여 동화회를 열 만큼 소년운동에 열심이었던 사람이다. 동화회에서 방정환 얘기를 듣고 순사도 울었다는 그 유명한 일화도 이 화성 소년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최영주, 순검과 소파, <어린이> 1931. 8)

최영주는 뒤에 방정환과 함께 개벽사 일을 하기도 했는데 방정환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린이>잡지 편집을 하기도 한다. 최영주는 편집의 귀재였다고 하는데 마해송은 최영주를 '참으로 활자를 아는 사람'이라고 기억한다.(마해송 수필집 <편편상> 최영주는 나중에 '박문서관'에서 일을 하며 방정환 전집(1940년)을 내기도 했다.

최영주는 방정환의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운 일로도 유명하다. 1936년, 방정환은 세상을 떠나고도 5년이 지났건만 무덤도 없이 홍제원 화장장 납골당에 있었다. 이를 가슴 아프게 여겼던 최영주는 윤석중과 뜻을 모아 월간 <중앙>에 '소파 묘비 건립 모금 광고'를 내고 여러 사람들의 뜻을 모아 망우리 아차산에 방정환 묘를 만들고 묘비도 세웠다. 그리고 1937년,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수원에 있는 선산을 두고 소파 묘 아래쪽에 아버지 산소를 마련했다. 방정환 숭배자였던 아버지를 방정환 가까이 모시는 일이기도 했고 또 자신이 소파 묘를 자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뒤 갓나서 죽은 자기 아들도 이곳에 묻었고 1944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난 자신도 유언에 따라 방정환 옆에 묻혔다. (신현득, 노래의 단비로 새싹을 가꾸며 윤석중 인물전, <소년조선일보>, 1996. 3. 30~12. 27)

최순애 동생 최영애도 10살의 어린 나이에 <어린이>에 동요 <꼬부랑 할머니>가 입선되었다.

꼬부랑 할머니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집행이 집고서 어데 가나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솔방울 줏으러 가신단다.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저녁에 어데서 혼자 오나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솔방울 이고서 오신단다.

<어린이>, 1925. 4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길을 가다가 꼬부랑 똥을 누었다는 우스운 옛날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그것을 약간 바꾸어 늙은 할머니가 힘겹게 솔방울을 주워오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최영애는 그 뒤에는 동요를 쓰지 않았는지 더이상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최순애 동요는 대부분 조용한 집 안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방안에서 밤 늦도록 바느질을 하거나(<그림자>) 이불 위에서 뛰놀기도 하고 (<이불 >), 조용히 마당 가 풍경을 바라보거나 (<가을>, <봄 날>) 집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기도 한다.(<오빠 생각>) 그나마 멀리라고 해야 동네 한 귀퉁이에 있을 듯한 기차 정거장 풍경을 그렸을 뿐이다.(<느림보 기차>)

식민지 시대에 힘겹게 사는 아이들을 동시 속에 담았던 이원수 시 세계와도 다르지만 억지로 예쁜 말이나 재미있는 말만 모아놓으려는 뒤틀린 말장난 시와도 많이 다르다.

시가 단순히 예쁜 말을 모아놓거나 관념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을 먼저 정확히 보고 바르게 듣고 섬세하게 느끼는 것은 시 쓰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최순애 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햇볕 보고 / 다시 사는 / 호박순 아기'(<가을>)를 발견하는 섬세한 눈길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맑은 동심으로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세계다.

이렇게 맑은 동심으로 동요를 썼던 어린 소녀 최순애도 할머니가 되어 지난 6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어린 소녀 시인 최순애만을 기억할 것 같다.
약한 몸으로 경난(經難) 속에 살아온 내 아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야 옳은지 잘 모르겠다.

처 최순애의 어릴 적 작품, 동요 오빠생각과 내 동요 고향의 봄이 인연이 되어 오랫동안 마음으로 생각하다가 결혼을 의논하게 되자 내가 일본 사람들에게 붙들려 가서 꼭 1년 동안 아내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기다려 주었었다.

내가 스물여섯, 처가 스물셋에 결혼했는데 실직의 가난 속에서 아내는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해방 되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나 역시 온갖 경난은 약한 그에게 너무나 과중하게 계속되었었다.

아내가 어려운 살림을 이날 이 때까지 해 오고 있는 것은 경제적 힘이 너무나 없는 남편 때문이지만, 그래도 그걸 견디어 내는 힘은 내 직업을 얕보지 않고 이해해 주는 데에서 생겼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의 고집과 자존심을 누구보다도 알아 주고 탓하지 않는 데서 아내는 경난 속의 일생을 능히 살아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내는 나처럼 늙어도 철이 없는 데가 있어, 때로는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 또 위해주고 염려해 준다. 싫을 때는 말로 하고, 좋을 때는 말 아닌 마음으로만 한다. 그러나 아내의 가장 사랑스런 모습은 내게서나 아이들에게 퇴박을 맞고 어리둥절할 때다. 그럴 때 내 마음에는 사랑의 불을 일으켜 주는 것이다.

어느덧 아내도 회갑을 지냈다. 이제는 그와 같이 살아온 과거가 슬펐거나 즐거웠거나 모두가 귀중한 세월이었다는 생각밖에 없다. 좀 편안히 살게 해 주고 싶건만 그러지 못해 걱정이다.
나는 한적한 농촌에서 살아도 조금도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비록 시골에 묻혀 있어도 시를 쓰는 친구들과의 연락은 언제나 한결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발표하고 또 편지로 자주 우정을 익혀가던 때였다. 그 중에도 동요 <오빠 생각>을 써서 나와 알게 된 수원에 사는 소녀 최순애와는 7년 넘어 편지로 사귀어 왔었다. 그러다 나는 그를 만나러 수원으로 여행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리 밖에 사는 한번도 보지 못한 최순애 소녀를 만나러 갈 생각을 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사실 최순애는 그 때 이미 소녀가 아니오, 시집갈 나이의 처녀였다.

그는 이미 10년 전에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오빠생각>이란 동요로 해서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서로 주고 받은 많은 편지에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처럼 되어있었다. 그러던 그 처녀도 이제는 시집을 가야 할 나이라 집안에서 혼사를 서두르게 되자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 왔고, 사정이 허락하면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비쳐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경제적 곤란을 이유로 여러 곳의 결혼 중매를 마다해 오던 터이었지만, 오랫동안 정다운 편지로 사귀어 온 최순애를 모른 체 할 수 없어 만나 이야기부터 해 보자 하고, 편지로 수원행을 알렸던 것이다. 나는 편지에 내가 입고 가는 양복의 빛깔과 소지품을 일러 주어 수원역에 나오겠다는 최순애에게 얼른 알아볼 수 있게 써 보냈다. 이렇게 해서 내일 오후 기차를 타고 모레 아침 일찍 수원역에 닿기로 되어 있었는데, 뜻밖에도 나는 함안 경찰서 형사에게 붙들려 취조를 받고 어두컴컴한 유치장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2월 그믐께였다 (1935년).
굵은 나무로 창살을 한 유치장 마룻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고 밤에 잘 시간이 되면 낡은 담요 한 장을 덮고 새우잠을 자야 하는 신세.
옆방에는 한 직장에 있는 친구가 잡혀 와 있었다. 나는 이 무리에서 쉽게 놓여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고생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수원역에서 나를 기다리다 헛걸음을 하고 돌아갈 최순애를 생각하니 기가 막했다. 누가 이 사정을 알려 주기나 하겠는가. 답답할 뿐이었다.

내가 철창신세를 져야 할 무슨 죄를 지었던가? 일본 경찰은 내게, '국가의 안녕 질서를 유린하고 일본 제국의 국체를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단체를 만들었다.' 고 몰아 세웠지만 사실은 그런 큰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농촌에 가서 살며 벌판이나 산골을 두루 다녀 본 나는 우리 농민들이 너무나 가난하고 시달리는 데 가슴이 아팠고, 그래서 농민들을 위해 문학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 중략 -

유치장 안에서의 나날은 지루하고 답답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는 일도 없다. 그러고도 종일 똑바로 앉아 있기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자리에 누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지만 눕는다고 해서 잠이 푹 드는 것도 아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모를 그런 상태가 많았다.
한번은 내가 찾아가려다가 못 간 최순애의 환상을 보았다.

경찰서 뒤쪽은 채소밭이고 그 밭가 길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탱자나무 울타리를 오락가락하며 울음 섞인 소리로 <탱자나무 꽃>의 노래를 부르는 여자를 보았다. 그게 최순애라 했다. 그러나 번득 정신이 들자 그 환상은 사라져 버렸고 나는 10촉 전등의 어두운 유치장 안에 누워 있었다.

- <흘러가는 세월 속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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