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책『고향의 봄』그림 김동성(2013년, 파랑새)
동원이원수선생
함께한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 소개글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 나라 어린이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고마운 분이시며, 한국 어린이 운동에 횃불을 밝히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운동에 앞장서서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쓰고 어린이날을 만들었지요. 전국을 순회하며 동화구연으로 어린이들을 웃기고 울리며 민족의 혼을 넣어 주셨고 손수 글을 쓰시고 어린이 잡지 등을 만들어 횃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연극 공연, 어린이잔치, 세계아동전람회, 축구대회와 강연회 등 일제의 박해를 수 없이 받으면서도 어린이 운동을 펼치시다 33세의 짧은 나이로 영원한 동화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선생은 운명하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색동회 동지들의 손을 잡으시고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이야기 잘 하는 선생님

서울 남산 어린이 회관 앞에, 두루마기를 입은 한 어른이 팽이채를 쥐고 있는 소년의 어깨에 한 팔을 얹고 앉아 계신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동상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 되었지만, 동화를 잘 하신 분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분으로 잊을 수 없는 어른이다. 그래서 '색동회' 가 발의한 동상 건립 운동으로 전국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정성이 한데 모여 이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방정환 선생의 동화는 참으로 유명했다. 방정환 선생이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그 이야기에 끌려들어 허리가 부러지게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한다. 이 소문을 듣고 한 어른이 와서 말했다.

"방정환의 동화에는 어른도 운다니, 그럴 수가 있나? 어디 나를 한번 울려 보게나. 나를 울게 한다면 세상 소문도 참말이겠지만, 어림도 없지?"

그런데 방 선생이 동화를 시작하자 이 분은 차츰 그 이야기 속에 끌려 들어가서 나중에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과연 동화에는 귀신같네."

그 어른은 방 선생의 동화를 그제야 알고 감탄했다.

일본의 압제를 받던 시대라 방 선생은 그가 내던 어린이 잡지 일로 경찰에 붙들려 가서 여러 날 감방에 갇히는 때가 있었다. 감방에는 죄 짓고 들어온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 방 선생은 그 사람들에게도 동화를 들려주었다. 답답하고 근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방 선생의 동화에 세상모르고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감방을 지키는 간수도 방 선생의 이야기에 홀려 같이 듣곤 했다. 그러다가 감방에서 나오게 될 때엔 간수가
"방정환 석방" 이라 하고 불러 내지 않고
"동화 선생 석방입니다." 고 하며 헤어지는 것을 섭섭해 했다고 한다.

방 선생은 어째서 그렇게 이야기를 잘 하셨을까? 물론 구변(말주변)도 좋고 이야기 할 때의 동작도 좋고, 좋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힘도 갖고 있다. 그래도 가장 큰 원인은 방 선생 자신이 그 동화 속에 빠져 들어간 때문일 것이다. 동화 속의 진짜 인물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원수>

방정환과 이원수

우리나라 사람 치고 방정환(1898~1931)을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흔히 안데르센을 가르켜 '동화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방정환은 '어린이의 아버지'다.
이 땅의 어린애 를 '어린이' 로 받든 사람, 바로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다.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무렵, 1899년 11월 9일 서울에서 싸전(쌀가게)과 어물전을 하는 큰 부잣집에서 태어난 방정환은 아홉살 되던 해에 집안이 하루 아침에 망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방정환의 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에 입 하나라도 덜고자 당시 열한 살이던 방정환의 누나를 시집보냈는데 그런 누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훔치던 아픈 기억은 훗날 약하고 힘없던 우리나라 어린이에 대한 연민으로 발전해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세계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가정사정으로 중간에 그만두고 월급 4원을 주는 토지 조사국의 서기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1917년 운동청년 단체인 청년 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천도교 교주이자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딸과 결혼했다. 천도교는 동학을 뿌리에 둔 종교로 근대 민족, 민중,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있었고, 결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1919년 3.1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다. 활발한 독립운동으로 천도교 회원들이 모두 움 끝에 방정환은 어린이 운동의 중요성을 제기하면서 '천도교 소년회' 를 조직하고, 1923년에는 몇몇 뜻 맞는 동경 유학생들과 '색동회' 를 만들면서 어린이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해 5월 1일 첫 어린이날 행사가 성대하게 펼치졌고 이보다 앞서 3월에는 천도교 소년회 발행으로 '어린이'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다. 그 후로는 <어린이> <신여성> 과 함께 <별건곤> 등 월간 잡지도 많이 발행했지만 33세 되던 해, 출판사의 빚에 대한 정신적 고통과 지나친 과로로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눈을 감으셨다.

<어린이>의 발행인일 뿐만 아니라 아동문학가, 어린이 운동가였던 방정환, 그는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첫머리에 놓이면서 많은 후배문인들을 키워냈다.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원수, 방정환은 <어린이>를 만든 지 네 해째 되는 1926년 4월 봄호를 어떻게 꾸밀까 곰곰이 생각했고, 이왕이면 봄소식을 알리는 내용을 넣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이> 4월호 맨 앞에다 서덕출의 동요에 윤극영이 곡을 붙인 <봄편지>의 악보를 실었다. 또 어린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탐정소설<칠칠단의 비밀> 을 넣고 다음에는 '깔깔 소학교' 에 들어갈 우스운 이야기도 이천 님의 빚을 갚기 위해 대신 팔려가는 언년이의 눈물나는 이야기로 실었다. 그런 다음 방정환은 이번 달 '입선동요' 란에 무슨 동요를 실을까 생각하다가 얼마 전 이원수가 보낸 <고향의봄>을 떠올렸는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 여기까지는 좋은데 진달래꽃을 비롯해서 또 꽃이름을 쭉 늘어놓은 부분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방정환은 진달래꽃 다음에 적혀있는 꽃이름을 다 지우고 '아기 진달래' 라고 짧게 고쳤다. 그런 다음 그 글을 <어린이> 4월호에 싣고 이원수에게는 <고향의 봄>을 실은 기념으로 메달을 보냈는데, 이렇게 해서 이원수는 마산공립보통학교 5학년 때 1926년 열다섯 살에 시인이 된 것이다. 실제로 이원수는 <소파 선생의 김화를 받고>라는 글에 스스로 아동문학을 하게 된 것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 덕분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 소파 선생의 그 고마운 어린이 애호의 정신에 감격하여 한번은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앞으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공부하고 쓰고 하겠다'고 맹서했습니다. -

아동문학의 큰 기둥 방정환, 그리고 이원수. 그들이 있었기에 이 시대, 우리 어린이들이 더 행복하고, 더 큰 희망을 가지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소식지 <꽃대궐> 2005년 7월호, 박미경 (꽃대궐)

윤석중 선생 소개글

호는 석동(石童)이다. 1911년 5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고보를 거쳐 1941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을 졸업하였다.
13세 때인 1924년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요 〈봄〉을 발표하면서 아동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1932년 첫 동시집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한 뒤, 같은 해 방정환(方定煥)의 뒤를 이어 잡지 《어린이》 주간을 맡았다.
이후 《소년중앙》(1934), 《소년》(1936), 《주간 소학생》 (1945)주간을 거쳐 1956년 어린이들을 위한 모임인 새싹회를 창립하였다. 이듬해 소파상, 1961년 장한 어머니상, 1973년 새싹문학상을 제정하였고,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장(1967), 《새싹문학》 주간(1977),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78),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1979) 등을 지냈다.
생활 주변의 친숙한 대상을 소재로 리듬과 운율을 살려 아름답게 표현한 우리말 동시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고추 먹고 맴맴〉 〈낮에 나온 반달〉 〈기찻길 옆〉 〈날아라 새들아〉 〈빛나는 졸업장〉 등 총 1,200여 편의 동시를 발표하였고, 이 가운데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졌다.

주요 동시집으로는 《잃어버린 댕기》(1933), 《윤석중 동요선》(1939), 《어깨동무》(1940), 《굴렁쇠》(1946),《아침까지》(1956), 《날아라 새들아》(1983) 등이 있다.
그 밖에 동화집 《바람과 연》(1966), 《작은 일꾼》(1967), 《열 손가락 이야기》(1977) 등을 출간하였다.
3·1문화상(1961), 문화훈장국민장(1966), 외솔상(1973),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2), 세종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인촌상(1992)을 받았고, 2003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두산백과사전> 중에서

어린이날 노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새나라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낮에 나온 반달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 끈에 딸랑딸랑 채워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신다 버린 신짝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짝발에 딸각딸각 신겨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 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 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 줬으면

기찻길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찻길 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고추먹고 맴맴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할머니가 돌떡 받아 머리에 이고
꼬불꼬불 산골길로 오실 떄까지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아버지가 옷감 떠서 나귀에 싣고
딸랑딸랑 고개 넘어 오실 때까지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이주홍 선생 소개글

향파 이주홍 선생은 1906년 5월 23일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1918년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을 맞았습니다.
14세 어린 나이의 그는 3·1운동의 양상에서 나라의 앞길은 새문물, 새학문에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상 새학문을 위한 진학의 뜻을 펴기는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1920년 고학이라도 하려고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사고무친의 서울에서 껌과 은단을 팔고 신문을 배달하며 고학의 꿈을 이루려 했습니다마는 정규 중학 진학의 길은 열리지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192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은 그 당시 우리나라보다 서구의 신문물을 먼저 받아들여 고학의 길도 쉬우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각박한 이국땅에서 겪는 나날의 노동은 육신의 허기를 채워줄 뿐 제도적 정규학교의 꿈은 그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경야독하는 삶은 뒷날 인간 존재의 의의를 헤아리는 체험적 예지로 열렸습니다.

1925년 이국땅에서 쓴 '뱀새끼의 무도'가 모국의 신소년에 발표된 일은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 얻어진 문학적 예지라면, 1928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우리 교포 자녀가 우리말 우리글을 잃어가는 실정이 안타까워 양인환씨와 근영학원을 설립하여 교사노릇을 한 것은 나라와 겨레의 내일을 염려한 실천 의지였습니다.

1929년에는 모국의 『조선일보』에 보냈던 단편소설 '가난한 사랑'이 입선된 그해 고국으로 돌아오니 아동잡지 신소년에서 편집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신소년은 경영이 지극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요, 동화, 동극은 물론 표지화, 컷, 삽화, 만화까지 혼자서 하는 노력과 재능을 발휘하여 어린이의 꿈을 살려갔습니다. 그는 신소년 편집에 그치지 않고 소설, 시, 희곡, 시나리오 등을 국내 잡지에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현대문학 초창기를 열어갔습니다.

1933년에는 종합문예지 『풍림』 창간에 동참하여 편집을 맡고, 1909년에는 잡지 『영화 · 연극』, 편집을 주간하고, 1940년에는 잡지 『신세기』 편집장으로 일했습니다. 그 당시 일제가 우리말 우리글의 말살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가 되어 그는 일본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1945년 봄 서울에서 체포되어 거창검사국에 수감되었습니다. 감방에서 풀려난 것은 1945년 8·15광복 다음날인 16일이었습니다.
풀려난 그는 배재중학교(당시는 5년제 중학)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연극운동과 창작활동을 병행해왔습니다. 『초등국사』를 발간하여 일제로 해서 상실한 우리의 국사교과서를 살렸습니다.

1947년에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동래중학(현, 동래고교) 교사, 1949년에는 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연극운동과 문학의 저변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문화의 불모지 부산이란 그때였습니다. 그의 창작은 아동문학, 시, 소설, 희곡, 평론, 시나리오 수필, 중국고전의 번역 등 문학 전 영역으로 펼쳐지면서 회화와 서예에까지 그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1968년에는 「문학시대」를 창간하여 문화의 불모지 부산은 물론 한국문학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부산에서 활동한 햇수는 40년이었고 일본과 서울에서 활동한 햇수를 합하면 60년이 됩니다. 60년 동안의 문학과 일반교양 저서는 각 출판사의 기획출판으로 중복된 것까지 합하면 200권 정도가 될 것입니다.

선생의 작품을 각 장르별로 평한 평가들의 평은 인간성의 옹호와 회복을 위한 휴머니즘의 세계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1967년 제1회 부산시문화상, 1962년 제 1회 경상남도문화상, 1963년 제1회 부산대학 학술공로상, 1968년 눌원문화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상, 1993년 대한민국문화훈장 1984년 대한민국문학상, 1987년 3·11 문화상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주홍 문학관 홈페이지에서 (www.leejuhong.com)

이주홍과 이원수

이원수문학관을 둘러보면 이주홍이라는 이름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주홍 선생님이 직접 선물하셨던 부채, 이원수 선생님이 글을 쓰고 이주홍 선생님이 삽화를 그린 시화, 그리고 선생님과 주고받은 편지까지. 특히 '원수 형으로 시작하는 이주홍 선생님이 이원수 선생님께 보낸 편지에는 이원수 선생님과 이주홍 선생님의 다른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이주홍 선생님은 풍자와 재치로 웃음을 주면서도, 가난한 부모, 형제, 조국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제 것을 귀하게 여기는 자주 정신을 일깨우는 동화를 많이 쓰셨던 분이다. 1906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며 문학작품을 쓰기도 했다. 1925년 잡지 <신소년>에 첫 동화 '뱀새끼의 무도'를 발표하고 1928년 조선일보에 첫 단편소설 '가난과 결혼' 이 입선하면서 아동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이후에는 동래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부산수산대학 교수로 있다가 1972년 정년퇴직한 뒤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지내기도 하셨는데 마지막 날까지 소년소설, 시, 수필, 서화, 음악 등 여러 문학, 예술에 다재다능한 재능을 발휘하며 한 평생을 아동문학과 함께 하셨다.

1900년 일제시대 이주홍 선생님은 카프의 일원으로 계급주의 아동문학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판적으로 이념화시킨 카프작가들과는 달리 이주홍선생님은 그만의 풍자와 재치로 어린이들의 정서에 맞는 서정이 넘치는 작품 세계를 세워나갔다. 특히 이주홍선생님 동화만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아동문학 작품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두 요소인 흥미성과 교훈성을 함께 갖추고 있다. 흥미성은 집중력이 부족한 어린이들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흥미성에 치우치다보면 작품이 저급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이주홍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우리 전통 문학이 지니고 있던 풍자와 해학으로 아동문학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또한 작품을 통하여 시대적 · 사회적 상황과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소외 계층인 서민을 등장인물로 삼아 서민들의 희노애락을 함께하고 있다. 이런 점은 추천도서로 많이 알려져 있는 <못나도 울엄마>라든지 <가재미와 복장이>, <청개구리> 같은 작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주홍 선생님은 아동문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이원수, 마해송선생님등과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문학의 전 영역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실제로 <서울손님 오신 날>이라는 작품속에는 삐쩍 마른데다가 뿔테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나오는데 이 분이 고향의 봄을 지으셨던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금세 그 사람이 이원수 선생님임을 알 수 있다. 어렵고 힘든 시대를 함께 사셨던 그 분들의 어린이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은 지금까지도 여러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데 조만간 날을 잡아 부산에 새로 꾸며져 있는 이주홍 문학관을 찾아보리라 마음 먹는다.

소식지 <꽃대궐> 2005년 10월호 홍기현 (꽃대궐)

1966년 6월 7일 이주홍 선생이 이원수 선생님께 보낸 안부 편지

원수형
오래간만에 편지를 접합니다. 나도 뭔가 하는 일도 없었으면서 편지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전숙희 여사의 편지가 와 있습니다 그려, 접때는 전여사와 황금찬씨와 놀았다지요.
그런데 첫째 궁금한 것은 전여사가 술을 마실 줄 압니까? 술 마실 줄을 모른다면 통 이야기가 안되는 게구요.

아무것도 아닌 저의 생일을 걱정해 주셔서 도리어 얼굴이 더워집니다.
이렇다한 일도 못하고 허둥지둥 나이만 까먹고 나온 걸 저도 어쩌겠습니까

아예 그런 내색은 안 내기로 했습니다.
괘니 남에게 치부를 보이는 것만 같아서 되려 어색해져서입니다.

오는 16일쯤에는 서울에나 한번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라도 한번 갔으면 했는데 00000000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려.
장경흡백천 격, 술을 매일 대통으로 먹고 있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몸 조심. 또 다른 여러 가지 일조심!!

유월칠일향파

이원수 선생님과 관련된 동화

동화 '서울 손님 오신 날' 에 보면 이원수 선생님과 이주홍 선생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동화 속에 이원수 선생님은 '서울 손님, 또는 굵직한 테안경을 쓴 말라깽이 할아버지'로 소개되어 있는데, 작품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서울 손님 오신날
이주홍

온 가족의 귀염 속에서 자라가고 있는 아기 고양이 살찐이는 그날도 신문을 보고 앉아 계시는 이주홍 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서 가르릉 가르릉 숨소리를 내어 가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따르릉···
벨소리에 살찐이가 깜짝 놀라 눈을 뜨자, 할아버지가 은옥이를 불렀다.
"은옥아, 누가 왔나 보다. 빨리 문간에 나가 봐라!"
은옥이가 대문을 따주기 무섭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이 선새앵! 안녕하시우우?"
하는 사람은 굵직한 테안경을 쓴 말라깽이 할아버지였다.
"아아니, 소문도 없이 이게 어쩐 일이오?"
두 할아버지는 서로 손을 맞잡고 흔들면서 몹시도 반가워했다.
"아유, 이 선생님이 오셨군요. 근데 왜 요즘에 걸음이 더디시죠?"
은아 엄마도 우물에 있다가 쫓아나와 인사를 드리니까? 말라깽이 할아버지는 역시 뜸직뜸직한 말소리로
"더디단 말 안 들으려고 이렇게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하고 껄껄 웃다간.
"그래, 그 동안 모두 무사들 하시구! 아이, 저놈 은아가 벌써 저만큼 커 있었구나, 어디 한 번! 안아볼까. 자 이리 와."
하고 두 팔을 벌려 은아가 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아는 처음. 눈을 뚜룩뚜룩 경계만 하고 있어 좀처럼 갈 눈치가 아니더니, 얼마 뒤에 조심조심 가서 안겨 봤다. 그러다가 한번 쳐다보고 두 번 쳐다보고 하는 새 얼굴이 익어지니까, 그때 할아버지의 셔츠 주머니에 꽂힌 볼펜도 빼어보고, 안경알을 손가락으로 꼭 필러 보기도 했다. 두 할아버지는 은아엄마가 내다 드린 맥주를 마셔가며 그 새 쌓여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서울의 이야기에다 주로 글쓰는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이주홍동화소설집 <못나도 울 엄마> 창작과비평사 수록

박홍근 선생 소개글

1919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다. 시 「돌아온 깃발」 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동시집 「나뭇잎 배」 와 「날아간 빨간 풍선」 등이 있고, 동화집으로 「은행나무집 아이들」「아기 물새와 고동소리」「정말 어디 간 거지」등이 있다. 소천 아동문학상과 이주홍 문학상 등을 받고, 2005년 현재 박홍근 아동문학상을 통해 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오덕 선생 소개글

1925년 경상북도 청송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부터 43년 동안 교육자로서, 아동문학가로서 아이들을 바르고 참된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어린이 문학과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힘쓰면서 동화, 동시, 수필, 어린이문학 평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냈다.
2003년 8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지은 책으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우리글 바로 쓰기><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농사꾼 아이들의 노래><개구리 울던 마을><일하는 아이들><문학의 길 교육의 길><어린이책 이야기> 등이 있다.

이원수 선생님이 이오덕 선생께 보낸 편지

이선생
너무 오랫동안 편지 쓰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주신 편지 읽고 많은 느낌이 있었는데 어째서 붓을 들지 못했는지 모르겠군요.
학교 생활에서도 느끼시는 그 울분을 짐작하겠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다 그렇지만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관계 깊은 곳이 썩어 있는 걸 볼 때는 더 기가 막힙니다.
그런 속에서 안간힘을 써 보아도 별 수 없고, 싸우면 떨려 나오게 마련이요.
묵묵히 썩자 하니 죄짓는 것 같고 ......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한가지에만 집착하지 말고 나를 살리며 견디어 나가는 도리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품으로 비평으로 고발하고 매질하는 것이 그나마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니겠는지요.

너무 신경을 쓰면 나 자신이 병듭니다. 술을 마시며 욕을 하며, 사랑도 하며 싸우십시오. 그것이 오히려 감화력 있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여름 방학이 금명간 시작되겠지요. 서울 놀러 오시오. 경주 구경도 할겸 나도 한번 여행이 하고 싶으나 요즈음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8월에는 부산도 한번 가고 경주도 들릴까 합니다. 이 선생님이 계시니까 좀 쉬 가질 것도 같습니다. 만일 가게 되면 8월 초간 경주 일박 정도가 되겠습니다.
67년 7월 24일
이원수

이원수 선생님이 이오덕 선생님께 보낸 편지

이오덕선생
보내주신 작문집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이들의 참모습을 거기서 보고 시골 아이들의 진면목을 새삼 안 듯 합니다. 일일이 주를 달아주신 사투리에 대해서는 저도 선생의 의견과 거의 같습니다만, 표현 방법의 지도로서 해결된 부분도 있습니다.

<머라 한다> 혹은 <머락한다> 따위는 뭐라 한다 <안마또 안하고>는 <암말도 안하고> 그 밖에 명사의 사투리는 표준어 사용의 기회가 많아지기 전에는 쓰기 어려울 것 같고 준말을 굳이 피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강재순 양의 <설겆이>는 내일 녹음해서 7월 4일 PM 5:20 에 동아방송으로 나갑니다. (강재순 양에게는 방송국에서 조그만 상품(?)이 갈 겁니다.)

글짓기 교육의 원고, 그러한 사정이라니 참 세상 일이란 참 어렵군요. 대구서 교섭할 수 있는 대로 해 보십시오. 언제든 내게는 꼭 될겁니다. 낙망하지 마시고 기회 있는대로 보충하십시오. 글짓기 교육의 바른 길은 달리 개척할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남에게 할 얘기는 아닌 줄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 아동문학의 정로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고 이선생은 글짓기 교육의 정로를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조 이석에 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전진해가는 여상에 있다는 자신은 가껴서 좋으리라 믿습니다.

경상도 여행 계획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시골 살때는 서울에도 자주 다녔는데 일단 서울 살게 된 후로는 그게 왜 그리 어려운 지 모르겠습니다. 장기 강습에 고생 많겠지요. 건강에 늘 조심하십시오.
7월 2일 밤 이원수

이오덕 선생이 이원수 선생님께 보낸 편지

이오덕선생
선생님, 이곳 돌아와서 진작 서신 올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평안하실 줄 아옵니다.
<兒童詩 敎育> 은 9백매가 조금 넘게 써 두었습니다. 수고스럽습니다만 적당한 곳에 좀 알아봐 주시면 합니다. 언제나 괴롬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협회 기관지는 아직 덜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대구 아동문학회의 <동화와 동시>는 일전에 가니 제본이 거의 다 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 이 가을에 한번 놀러 오시게 하는 일은, 요즘 학교의 행정적인 일이 좀 바쁩니다. 다음 달 쯤 다시 연락 올리든지 아니면 혹 <아동시 교육> 원고 가지고 상경했다가 오는 길에 모셔 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집이 워낙 누추해서 걱정입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버섯 따러 등산을 간다는 것이 그만 다른 일로 못가고 말았습니다. 송이가 나는 곳이지만 워낙 따서 얻기 힘들고 싸리 버섯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버섯보다도 산에 오르는 즐거움이 더합니다. 1,000m가 넘는 운달산 바로 금룡사가 있는 산 - 봉우리를 이 가을에는 꼭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부디 이 가을에는 더욱 안강하시고 더욱 젊어지시기를 빕니다.
다음 달에나 뵈올지 모르겠습니다.
9월 2일 이오덕 올림

이원수 선생님이 이오덕 선생께 보낸 편지

이선생
참 오랜만에 편지 씁니다. 일전의 편지와 아이들 작품들은 감회 깊게 읽었습니다. 일꾼이 되다시피한 이선생을 상상해보고 스스로 미소지었습니다.

정말 그런 고생을 하면서 가르치려는 일념에 사는 것은 얼마나 성스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운동장을 넓히고 교실을 다듬고 사택을 짓고... 애써 일한 보람이 꼭 있을 겁니다. 언젠가는 나도 한번 그렇게 일하고 가르치는 곳에 가보겠습니다. 그런 곳의 산천에 몸을 세워보고 그런 곳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신문 <산마을>은 전국 각 국민학교에서 많이들 내고 있는 여러 신문과는 다른 진짜 신문입니다.
이만큼 교육에 진지한 생각을 드러내고 아이들의 소박한 글을 싣는 신문이 거의 없습니다.
잘해 나가십시오. 활판인쇄가 아니라도 훌륭합니다.
다음에 아이들의 글짓기가 잘 되는대로 책이라도 내시면 좋겠지요.

바야흐로 여름. 산골의 초하는 한결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새 사택에서 밭에 심은 채소와 닭장의 달걀로 건강해 지십시오.

부인 인자 선생도 안녕하시겠지요? 혹시 고향생각 하시지나 않는지? 해도 괜찮을 겁니다. 지금의 생활은 값있고 즐거운 것일 테니까...
1968년 6월 14일 이원수

이준연 선생 소개글

이준연 선생님은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그 후 줄곧 재미있고 유익한 동화들을 펴내 그 공적으로 1978년 한국 아동문학상을 비롯하여 세종문학상(1980), 한국어린이도서상(1982), 해강아동문학상(1983), 대한민국문학상(1985), 한국불교아동문학상(1993), 방정환문학상(1994), 어린이문화대상(1998) 등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종이새가 된 편지』, 『춤추는 허수아비』, 『하루나라 하루왕』 등 70여 권의 창작동화와 『북 치는 송아지』등 50여권의 한국전래동화를 썼습니다.

이준연 선생이 이원수 선생님께 쓴 편지

이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10월 5일, 고향 마을로 되돌아왔습니다.

“교육자료” 에 서평은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일년 남짓 지나던 지난 일들이 아름답게 떠 오릅니다.

선생님과 가깝게 지나던 일들은 영영 잊을 수가 없습니다.
디즈니, 향앙라, 삼미집, 어떤 늦은 봄날 찾아갔던 사당동의 관학 다방의 일들이 어쩌면 제 일생에 크게 남을 행복된 날들로 제 가슴과 머리 속에 깊이 간직될 것만 같습니다.

선생님!
서울이 싫어져서 고향으로 되돌아 오긴 했지만, 저의 요지음 심정은 슬프고 외롭기만 합니다.
바다 밑에 가라앉은 돌멩이 같이 주위는 서먹서먹하게 고요하고 외롭기만 합니다.

서울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게 운명을 저는 작품으로 승화시켜 제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합니다.

선생님! 다음에 이곳 소식 띄워드리기로 하고 이만 주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72.10.12
이준연 올림

손춘익 선생 소개글

1940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1966년에 조선일보와 매일신문에 동화가 당선된 후 많은 단편 소설과 동화를 발표하였습니다.
<포항문학> 편집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를 지냈으며, 그동안 세종아동문학상,(1972), 소천아동문학상(1981), 경북문화상(1982) 등의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2000년도에 돌아가셨으며, 살아계시는 동안 많은 작품을 남기셨고, 문단에서도 아주 중요한 일들을 맡아 하셨습니다.
작품으로는 <송아지가 뚫어준 울타리 구멍>, <땅에 그리는 무지개>, <어린 떠돌이>, <마루 밑의 센둥이>, <염소 메헤헤와 개구쟁이들>, <천사와 보낸 하루>, <새를 날려 보내는 아저씨>, <꿀떡해 버린 꿀떡>, <점박이와 운전수 아저씨> 등이 있습니다.

손춘익선생이 이원수선생님에게 보낸 편지

이원수 선생님께
손수 보내주신 사진과 글월 큰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진작 소식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최근에는 <詩가 있는 산책길>에 심취되어 있습니다.
아마 두고 두고 이 길을 거닐게 될 것 같습니다.
언제라도 바다로 오십시오.
작품은 몇 편 있으나, 어쩐지 세상에 내어 놓기가 두려워 망설이고 있습니다.
좀더 게 무딘 솜씨로 나마 갈고 다듬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선생님께 드려서 가혹한 채찍을 기다리겠습니다.
저 빛나는 오월의 햇빛과 함께 늘 기뻐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5월 25일 새벽
춘익 드림

이재철 선생 소개글

평생을 아동문학 연구에 매진하면서 수많은 연구논저를 내고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여온 이 방면의 대표적인 학자는 이재철이다.
그는 《아동문학개론》(1967)을 낸 데 이어서 박사학위 논문 《한국현대아동문학사》(1978)를 책으로 출간함으로써 한국 아동문학 연구의 한 획을 그었다. 이재철은 아동문학 비평전문지 《아동문학평론》을 1976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발행해 오고 있으며, 한국아동문학학회(1988)를 창설하여 한국 아동문학 연구 및 그 성과를 대변해 오고 있다.
계간지 《아동문학평론》에는 매호 다섯 편 내외의 연구논문과 평론이 포함되어 있다. 그 자신이 《한국아동문학작가론》(1983)의 저자이기도 하지만, 후학들의 논문을 모은 《한국아동문학작가작품론》(1991; 총 38명의 집필자 참여), 《한국현대아동문학작가작품론》(1997; 총 72명의 집필자 참여)의 편저자로서도 이재철의 위치는 확고하다. 이런 그의 노력에 힘입어 아동문학과 관련된 학위논문은 일반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을 합쳐서 지금까지 총 300편이 조금 넘는다. 이 중에서 박사학위논문은 20편 가량이다.

- 한국아동문학 연구의 현황과 과제에 수록된 글 중에서

신현득 선생 소개글

1933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안동사범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 단국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대한민국아동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해강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1년부터 팔만대장경의 불교설화를 연구하여<누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불교설화집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아기 눈>, <고구려의 아이>, <엄마라는 나무>, <바다는 한 숟갈씩>, <몽당연필로 시쓰기>, <달나라에서 지구 구경>, <대추나무 대추씨>, <고향 솔잎>, <내 별 찾기> 등의 책을 냈다.

권정생 선생 소개글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으로 등단한 권정생은 자연과 생명, 어린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다뤄왔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물과 힘겨운 인간의 삶을 보듬는 따뜻하고 진솔한 글로 어린이는 물론 성인 독자들로부터 폭넓게 사랑받았다. '몽실언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는님의 눈물, 등 다수의 아동 문학작품을 남겼다. 1984년 출간된 '몽실언니'는 60여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한 아동문학계의 대표 베스트셀러.

그는 1937년 일본 도쿄 변두리 빈민촌의 헌옷 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행상에 넝마주의였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했다. 이때 아버지가 주워온 헌책 더미에서 '인어공주' 와 같은 동화책을 읽으면서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
광복을 맞아 가족이 귀국해 외가인 청송군 화목면에서 초등학교를 1년간 다녔다. 이후 아버지 고향인 안동군 일직면으로 이사했으나 비루한 살림에 더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를 해다 병아리를 사 키우는 등 힘든 소년기를 보냈다.
좀 더 커서는 안동읍내의 한 잡곡상에 취직했지만, 저울을 속이라는 주인의 말에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 길로 월급도 안 받고 부산으로 향했다. 재봉털 수리도 하고, 신문도 배달하며 힘겹게 살던 중 열여덟 살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신결핵까지 얻었다.
고향에 왔지만, 동생이 결혼하면서 함께 살 수 없어 집을 나오게 된다. 이후 그는 예천 등을 떠돌며 거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나이 서른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부모는 죽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이후 일직면 조탑리의 교회 종지기를 시작하며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켜 동화를 쓰게 된다.

그는 40년 가까이 병을 달고 살았다. 오줌도 호스로 받아냈고, 하나밖에 없는 신장마저 결석으로 고통받았다. "하루라도 안 아프고 살아봤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얼마나 아팠으면 지나가는 말로 "니(김용락)가 내 대신 아파도고." 라고 했을까. 건강이 좋았을 때도 여름에 '풀짐을 한 짐 지고 있는 것' 처럼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소외받고 힘없고, 약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삶의 희망과 믿음을 그려낸 동화를 썼다. 1967년 '강아지 똥' 만 해도 그렇다. 아무 쓸모없다고 슬퍼하던 강아지의 똥이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 는 흙의 말을 듣고 희망을 얻어 거름으로 부서져 고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다. 대표작인 '몽실언니' 에 나오는 인물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천대받는 이들이다.
그는 철저히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새 옷을 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 겨울에도 헌 군복에 누비 솜바지에 고무신을 신었다. 살림도 20년 가까이 벽지도 안 발린 헛간에 다 그을린 양은냄비, 석유곤로가 고작이었다. '몽실언니' 의 인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던 흙집을 지었고, 최근에야 8인치 TV를 들였다고 한다.
'겨울이면 생쥐들이 와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 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그렇다고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몽실언니' 만 하더라도 1년에 4만 부가 팔린다. 인세만 3천200만 원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의 책은 약 80여 종에 이른다. 그는 돈이 생기면 남을 위해 다 썼다.

서울 청량리 윤락녀 쉼터 짓는 데도 보냈고, 앵벌이들을 위한 보호소를 짓는 데도 기부했다. 그는 어린이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어린이들을 상대로 판 책 수입인데, 어린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는 생각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남달랐다. "배고프셨던 어머니 / 추우셨던 어머니 /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 ... / 어머니와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 오래오래 살았으면..."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중에서 ). 지금쯤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도 함께 구경하고 있을까.
"내 죽을 때 300만 원 있으면 된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돈으로 화장해 집 근처에 뿌리고, 집도 없애 자연 상태로 돌리고, 기념관도 절대 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철저한 무소유에 금욕으로 평생을 산 그는 처음 올 때처럼 '무' 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아프고, 평생 외롭고, 평생 힘들었던 그는 유언장에 이렇게 썼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스무 다섯 살의 건장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스무 두세 살 된 아가씨와 연애하고 싶다. 그때는 벌벌 떨지 않을 것이다.'
1930   ~  1954년대
  • 1937년
    • 일본 도쿄 혼마치에서 출생
  • 1938년 (1세)
    • 7월 둘째형 목생 사망
  • 1946년 (9세)
    • 3월 귀국, 가난 때문에 식구들이 다시 뿔뿔이 흩어짐.
  • 1947년 (10세)
    • 식구들이 모여 안동 일직에 정착
  • 1948년 (11세)
    • 안동 일직국민학교에 여덟 살 동생과 함께 1학년에 입학
  • 1950년 (13세)
    • 6.25 전쟁 발발로 다시 가족들은 흩어짐.
  • 1953년 (16세)
    • 안동 일직초등학교 30회 졸업식에서 전교 1등으로 졸업.
    • 여름부터 객지생활 시작,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점원노릇, 야간학교에 나가 공부.
    • 겨울에는 고학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고 집을 나감.
1955   ~  1965년대
  • 1955년 (18세)
    • 여름에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함.
  • 1956년 (19세)
    • 결핵 발병, 늑막염과 폐결핵이 겹침.
  • 1957년 (20세)
    • 2월, 5년 만에 어머니에게 끌려 집에 돌아옴.
  • 1958년 (21세)
    • 늑막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짐.
  • 1964년 (27세)
    •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
  • 1965년 (28세)
    • 집을 나감. 4월 중순 경 기도원에 들아갔다가 열흘만에 나와 3개월간 거지 생활을 함.
1966   ~  2007년대
  • 1966년 (29세)
    • 5월에 콩팥을 들어내는 수술을 함. 12월,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함.
    • 하나 남은 콩팥도 병이 들었지만 다 들어내면 안 돼서 바깥으로 소변주머니를 다는 수술을 함.
  • 1968년 (31세)
    • 2월 일직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됨. 『강아지 똥』을 동시로 썼는데 만족스럽지 못했음.
  • 1969년 (32세)
    •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 모집에 『강아지 똥』 당선.
  • 1972년 (35세)
    • 가을 이오덕이 기독교교육에 실린 『강아지 똥』을 읽고 찾아옴.
  • 1973년 (36세)
    •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 1974년 (37세)
    • 8월 첫 단편동화집 『강아지 똥』 (세종출판사)을 펴냄.
  • 1983년 (46세)
    • 빌배산 아래 빌뱅이 언덕에 청년들이 지어준 8평짜리 작은 흙집으로 이사.
  • 1990년 (53세)
    • 『몽실언니』가 MBC에서 36부작 드라마로 제작,
    • 1990년 9월 1일부터 1991년 1월 5일까지 방영됨.
    • 장편소년소설 『점득이네』(창비), 단편동화집 『할매하고 손잡고』(올바름) 펴냄.
  • 2007년 (70세)
    • 3월 31일 오후 6시 10분에 정호경 신부에게 마지막 글을 씀.
    •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5월 17일 오후 2시 17분 대구 가톨릭대학병원에서 사망.
    • 그림책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이담 그림, 보리) 출간, 『몽실언니』가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멕시코에서 출간.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196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마치(本町)의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토리로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키도 작고 손도 조그만 히데코 누나는 항상 말이 없고 외로워 보였다. 함께 극장에 가면 고구마튀김을 수건에다 겹겹이 싸서 식지 않도록 품속에 넣어뒀다가 영화가 중간쯤 진행될 때 꺼내어 내 손을 더듬어 쥐어주던 그 따뜻한 촉감은 평생을 잊을 수 없다.
아무렇게나 흘러들어와 모여사는 빈민가 사람들의 가족구성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골목길 끄트머리 노리코네 아버지는 조선사람, 어머니는 일본여자, 노리코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딸이었다. 건너편 집의 미치코는 주워다 키운 아이고 동생 기미코는 조선아버지와 일본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고 우리 앞집 일본인 부부도 양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 집 건너 경순이는 관동지진 때 부모를 잃고 거기서 식모살이처럼 얹혀살고 있었다.
경순이는 가끔 얻어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우리집으로 쫓겨왔다. 어머니는 어루만져 달래주고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경순이에 대한 추억은 이따금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스무살이 넘었을 것이라 했지만 경순이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몰랐다. 오테다매팥주머니를 만들자면 보통 팥알을 넣는데 경순이는 그럴 수 없어 우리집 추녀밑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자잘한 돌멩이를 골라 만들곤 했다.
소설 <몽실언니>는 혼마치에 살았던 히데코 누나이기도 하고 경순이 누나이기도 하고 그외의 가엾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1946년 해방 이듬해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때, 조선인연맹에 가입했던 형님 두 분은 다음에 돌아오기로 했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울타리의 동백꽃이 피던 3월에 후지오카의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차에 오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떠밀려 태워졌고 차는 떠나고 말았다. 만 8년 6개월 동안 어렵지만 정들어 자라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가슴이 쓰리고 서러운 일이었다.
1946년 4월은 보릿고개가 심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먹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 세끼 먹는 집은 드물었다. 만주와 일본에 갔던 동포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는 우리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외가가 있는 청송으로 갔고 아버지와 누나는 안동으로 갔다. 함께 모인 것은 47년 12월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네 군데 다녔다. 도쿄의 혼마치에서 8개월, 군마켓에서 8개월, 조선에 와서 청송에서 5개월, 그리고 나머지는 안동에서 졸업을 했다. 그것도 잇따라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달씩 몇 년씩 쉬었다가 다니는 바람에 1956년 3월에야 겨우 졸업을 했다.
아버지의 소작농사만으로는 월사금을 못내어 어머니가 행상을 하셨다. 한달에 여섯 번씩 가시는데 장날 갔다가 다음 장날 돌아왔다. 그러니 자연히 밥짓는 일은 내가 맡아야 했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설거지하고 학교 가자면 바쁘게 달려가야 했다. 그때 열살 때부터 밥을 짓는 것을 배웠으니 훗날 혼자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장수였고 다음이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그리고 점원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 살때부터였다. 처음엔 숨이 차고 몹시 피곤했지만 그런대로 두 해를 더 버티다가 결국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나 말고도 10여명이나 되었다. 식모살이 갔던 성애와 철도기관사 조수로 일하던 태호, 산판에서 일하던 청수, 기덕이, 옥이, 성란이 우리는 이따금 나오는 항생제를 배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약이 필요한 만큼 공급되지 않아서였다.
하나 둘씩 차례로 죽어갔다. 열일곱살의 기덕이는 빨간 피를 토하다 죽고, 열다섯살의 옥이는 주일학교 동무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 죽고 마지막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갔다. 병을 앓는 나도 고통스럽지만 식구들의 고통은 더 심했을 게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 병구완하시느라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장티푸스를 잃으면서 실신하시고 셋째는 열일곱 살 때 잃고, 둘째와 넷째는 해방 이듬해 헤어진 뒤 결국 다시 만나보지 못하셨다. 그런 어머니는 1954년 가을에 세상을 뜨셨다. 몸져 누우시기 전날까지 병든 자식 걱정하며, 헤어진 자식 기다리며 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그래서 이 무렵 나는 동생을 결혼시켜야 하니 어디 좀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무작정 집을 나왔다.
1965년 4월에 나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그때 대구에서는 이윤복군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가 영화화되어 거리마다 극장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나는 대구에서 김천으로, 상주로, 점촌, 문경, 예천으로 3개월을 떠돌아다녔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걸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병 한 가지를 더 얻었다. 그때부터 앓기 시작한 부고환결핵으로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올랐다. 산길에 쓰러져 누워 있다보면 누군가가 지나다 보고 간첩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서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한평생 당신들의 집이 없었다. 가엾은 분들이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팩팩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 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 집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심성이 착해서 좋다. 이름을 '뺑덕이' 라 지었더니 아이들이 왜 하필이면 뺑덕이라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미가 훨씬 인간적인 가엾은 여인이어서 좋기 때문이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 살다가 지금은 이곳 산 밑에 그 문간방과 비슷한 흙담집에서 산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굶주림,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앞서간다는 선진국은 한층 더 심하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살인을 한 대가로 얻은 풍요를 누리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일 따름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선진과 후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단도 하루속히 무너뜨려야 한다. 경제적 후진만으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 가봤는가요?"
"예, 못 가봤습니다. "
"그럼, 연애도 못 해봤나요?"
"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6)> 에서

권정생 선생님 유언장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1)

주중식한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끌러보니 조그만 종이상자에 과자가 들었다.
가게에서 파는 과자가 아니고 집에서 만든 것 같다.
소포에다 폭탄도 넣어 보냈다는데
잠깐 동안 주중식과 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생각했다.
십 년이 넘도록 알고 지냈지만 원한 살 일은 없는 것 같다.
과자 부스러기를 하나 혀끝에 대어보니 아무렇지 않다.
좀더 큰 것을 집어 먹어봐도 괜찮다.
한 개를 다 먹고 다섯 시간 지나도 안 죽는다.
겨우 마음이 놓인다.
주중식과 나 사이는 아무런 문제없이 돈독함이 확인되었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밭 한 뙈기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김녹촌 선생 소개글

1927년 장흥에서 태어났으며, 광주사범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연’이 당선되었고, 1977년에 세종아동문학상을, 1996년에 대한민국동요대상(노랫말부문)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 동시집 <소라가 크는 집> <쌍안경 속의 수평선> <언덕배기 마을 아이들> <태백산의 품 속에서> <꽃을 먹는 토끼> 등이 있습니다.

이오덕의 표절 동시론 때문에 시끄러웠던 당시 김녹촌이 보낸 격려 편지를 보고 이원수 선생님이 보낸 편지

녹촌님 감사합니다.
**로 보내주신 격려의 말씀 느낀바 많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의연한 태도로 임하고 있습니다. 동봉한 것은 어제 (9월 6일) 에 전국 각 신문, 통신, 문예잡지사 등에 발송한 것입니다.

문인들에게도 오늘쯤 발송하게 될 것입니다.
?씨의 고소 취하가 그래도 조용한 길이라 생각한 집필자들을 위해 일면으로는 무마 방법도 써 보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이편을 악화시키는 것이기에 이게는 내 이름으로 그간의 경위와 ?의 무고를 세상에 밝히는 글을 쓴 것입니다.

양 단체 해산 운운은 터무니 없는 소리고 실은 저쪽에서도 내게는 그런 소리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간 지상에 어느 정도, 우리 의사가 반영되리라 믿습니다.
염려해 주어 거듭 거듭 고맙습니다.
건강이 안 좋은 모양인데 빨리 회복하십시오.
- 이원수 -

임신행 선생 소개글

임신행 선생님은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이후 어린이들을 위한 많은 작품을 쓰고 계십니다. 지은 책으로는 「베트남 아이들」 「강강술래」 「들꽃숲의 이야기」 「까치네집」 등 50여 권의 동화와 소년소녀 소설집이 있고, 시집 「동백꽃 수놓기」(문학세계사)도 출간하셨습니다. 그리고 늘원문화상, 이주홍아동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경남문화상, 한국어린이도서상(저작 부문), 대한민국문학상(아동문학 부문) 등을 받으셨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동원 이원수 선생님과 필자와 연줄이 이어진 것은 한국아동문단에서 전쟁동화의 효시라고 이따금 거론해주는 동화집<베트남 아이들>이다.
<베트남 아이들>은 필자의 첫 통화집으로 교학사敎學社서 간행된 작품집이다. 한국전쟁동화라고 연구해 주시는 평론가들에게는 고맙게 여기고, 독자들에게는 사장된 책이라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연이 많은 책이다. 동원 이원수 선생님과의 한 또 다른 이야기들은 다른 지면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인연의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집필을 권유 받게 되기 때문이다.

60년대 오직 대학 진학을 해야 하겠다는 야심으로 남들이 가면 죽는다는 베트남 전쟁에 필자는 지원하여 참전했다. 2년 가까이 참전 생활을 하다 필자는 66년 7월에 포화의 베트남에서 귀국하였다. 최계락 선생님의 소개로 베트남 포화 속에서 쓴 동화들을 교학사에서 출간한 책이 바로 <베트남 아이들>이다. 책을 손에 넣자 최계락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최 선생님은 기본을 보낼 분을 주소와 함께 선별해주셨다. 모두 열한 분이었다. 책을 드린 열한 분 중에 책을 받았다고 편지를 주신 분은 이원수 선생님, 임인수 선생님, 이종택 선생님. 이주홍 선생님, 조풍연 선생님, 김동리 선생님, 박홍근 선생님 이렇게 일곱 분이었다. 이원수 선생님은 엽서에 책을 받았다는 내용의 글과 한국아동문단의 기대주라는 말을 적어 주셨다. 필자는 한껏 고무되었다. 그 다음해 한국문예진흥원에서 간행한 문예연감에 이원수 선생님은 아동문학부문을 집필하시면서 필자를 엽서에 보내주신 고무의 말과 함께 언급하신 것을 훗날 확인할 수 있었다. 웅진 출판사에서 간행된 이원수 문학전집 30권에 수록되어있다. 동원 이원수 선생님을 가깝게 모신 것은 75년 필자가 창녕 남지국민학교에서 마산시 봉덕국민학교에서 전근 오고서부터다. 이원수 선생님은 마산으로 걸음하시면 필자에게 전화를 주셨다. 그 무렵 동시인 조무근씨가 낸 동시집 <하늘을 도는 굴렁쇠>와 동시인 이창규씨의 첫 동시집<무지개 다리>의 책 머리글을 동원 이원수 선생님이 써 주셨다. (두 분의 동시집 제목은 필자가 착안한 것임을 밝혀 둔다.)

"임 선생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써야지. 또 고향 후배들인데...."

동시집 원고를 보내라고 하셔서 보내드리고 귀한 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조무근 선생의 동시집 출판기념회 때도 동원 선생님은 오시어 격려의 말씀도 해주셨다. 동원 이원수 선생님은 향리의 후배 문우들을 유별나게 아끼신 어른이셨다. 「여원」에 등단한 김 모 여류 시인이나, 동화작가 이 모 씨에게 좋은 영향을 주신 어른이시다. 동원 이원수 선생님은 술자리도 화려한 곳을 굳이 사양하셨다. 산호동, 아니면 오동동의 허름한 통술집에 앉아 계시기를 즐겨 하셨다. 물론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하시기를 좋아하셨다. 동원 이원수 선생님이 부르시는 노래는 <고향의 봄>보다 <겨울나무>이었다. 의연한 결의 같은 기풍으로 부르시는 선생님의 겨울나무는 애잔하고 서러웠다. 그러나 울림이 컸다.
가을비 추적추적 오는 해질녘에 <겨울나무>를 부르시던 동원 이원수 선생님의 풍경은 필자의 가슴에 목판화로 각인이 되어 있다. 비 오는 날이면 필자도 모르게 <겨울나무>를 부르며 눈물을 지운다. 부끄렵게도 필자는 <베트남 아이들>을 소장하지 못하고 있다. 이원수문학관에 이원수 선생의 따님인 이정옥 교수가 생전에 이원수 선생님이 소장한 책들 일부를 보내 주셨는데 그 속에 필자가 보내드린 <베트남 아이들>이 끼어 있었다. 문학평론가요, 인하대학교 원종찬 교수님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자료로 하기 위하여 「베트남 아이들」을 찾았다. 필자는 부산 이주홍문학관과 창원 이원수문학관에 그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었다. 원종찬 교수님은 이원수문학관에서 대여하여 복사본을 만들며 필자에게 한 권 보내 주었다. 소중히 소장하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원종찬 교수님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한번 이원수선생의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를 되새김질한다.

<꽃대궐 2009년 2월호> 수록

어린이를 사랑한 동화문학의 개척자 - 마해송

우리나라 아동문학사를 이야기 할 때, 이원수, 이주홍 선생님과 함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바로 마해송 선생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라와 아기별'을 쓰신 분으로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동화는 물론이고 동요와 수필, 소설 등 많은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올해는 마해송 선생님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 파주 중앙호수공원에는 '마해송 아동문학비' 가 세워지고 올해 들어서는 전국 곳곳에서 마해송 선생님의 삶과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갖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마해송 선생님은 방정환 선생님보다 여섯 해 늦은 1905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에는 방정환 선생님과 함께 '색동회' 를 결성하여 어린이 문화운동을 하셨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인 '바위나라와 아기별' 을 「어린이」 지를 통해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1990년대 전후에는 홍길동', '토끼와 원숭이', '호랑이와 곶감' 과 같은 동화로 민족독립의식을 담아 내셨고, 1950년대 전후에는 '떡배 단배'. ' 사슴과 사냥개, '모래알 고금' 같은 동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에 대한 희망을 담아 내셨다.

마해송 선생님의 동화가 전래동화에서 벗어나 창작동화에 이르는 다리 역할을 한 만큼 그의 동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터무니없이 어린이들에게 교훈적인 결말을 강요하던 다른 동화와 달리, 마해송 선생님의 동화에서는 그런 도식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장 또한 그 당시 다른 동화들이 어려운 한자말을 많이 쓰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데 비해 마해송 선생님의 문장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려고 억지로 꾸민 흔적이 없으면서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자연스러워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 마해송 선생님의 동화가 갖고 있는 이런 특징은 바로 1900년대 초의 다른 동화와 비교해서 한발 앞서 나간 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해송 선생님 동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바로 저항의식이다. 이것은 방정환 선생님의 동화가 갖는 동심천사주의와 눈물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저항의식이야말로 다른 도덕적인 품성과 함께 아이들에게 고양되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껏 아동문학에서 금기시했던 '저항정신' 의 필요성을 여러 작품을 통해 새롭게 깨우쳐 보고자 했다. 이오덕 선생님 역시 '마해송의 동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사회의 잘못을 잡으려는 생각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창작동화를 쓰고 그 이후, 많은 창작동화들의 튼튼한 뿌리가 되어 온 마해송 선생님, 그는 누구보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의 삶을 올바르게 가꾸기 위해 애쓴 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해송 선생님이 살아생전 일궈온 일에 견주어 보면 선생님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비한 상태라고 한다.
올해는 마해송 선생님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 선생님이 남긴 동화를 찾아 아이들과 함께 읽어나가는 시간이야말로 선생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리는 작고 소중한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모인다면 마해송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는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 질 것이다. 오색 단풍이 아름다운 계절, 마해송 선생님의 창작동화 '바위나라와 아기별'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마음속에 붉은 낙엽처럼 군다.

소식지 (꽃대궐 2005년 11월호, 김형엽(꽃대궐)
이원수문학관 / 주소 : (51371)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평산로 135번길 32 고향의봄도서관 지하 1층 (서상동 산60번지) / 대표전화 : 055-294-7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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