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책『고향의 봄』그림 김동성(2013년, 파랑새)
작품감상
친일작품

이원수 선생의 일제 말기 친일시에 대하여

우리에게 동요 '고향의 봄' 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 아동문학의 거목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원수 선생이 일제 말기에 친일 글 몇 편을 쓴 것으로 밝혀져 많은 혼란과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이원수 선생이 결혼 후 가족들과 힘들게 살아야만 했던 그 고난은 헤아릴 수 있겠지만, 친일글을 쓴 것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고 용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많은 친일 인사들이 걸어온 길이 친정권과 친독재의 길이었다면, 이원수 선생이 걸어온 길은 철저하게 정권과 독재에 항거하며 자유와 민주를 위해 아동문학의 정신을 올곧게 세우는 길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와 신천사주의의 흐름 속에서도 이원수 선생은 아동들에게 현실의 참모습을 알려주고 스스로 그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아동문학이 해야 할 일임을 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 현실주의적 아동문학관으로 작품활동을 해오셨던 이원수 선생의 정신은 작고하신 이오덕 선생의 아동문학과 글쓰기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 권정생을 비롯하여 많은 아동문학인들의 작품 속에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후배로 함께 활동을 하시며 올곧은 정신으로 일생을 어린이 글쓰기교육 운동에 몸바쳐 일하셨던 이오덕 선생의 글을 이원수 선생의 친일시와 함께 전시합니다.

이오덕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쓰신 글

선생의 친일시는 우리 민족 앞에서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 더 실망하지는 않는다. 이원수 선생이 쌓아놓은 문학의 업적이, 선생의 그 전과로 하여 무너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선생의 문학을, 우리 겨레 어린이 문학을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기둥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또한 선생의 사람됨을, 이 세상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맑고 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분으로 언제나 가까이 하여왔던 지난 모든 날들을 결코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 만큼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난 적이 없다. 작품으로도 그렇다. 4·19 때 독재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쓰고 동시로 쓴 사람은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을 불태운 사건을 동화로 쓴 사람도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남북 분단의 비극과 통일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 겨레의 슬프고 애끓는 바람을, 선생은 여러 동화작품에서 훌륭하게 그려 보였다.

선생은 이렇게 올곧게 살았고, 우리 어린이 문학에서 그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도 세상살이에서는 언제나 푸대접을 받았다. 권력과 손잡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선생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가는 길과 아주 어긋난 사람의 손을 잡은 일이 없었다.

이렇게 살았던 태도로 미루어 선생은 일제 말기에 한때 저질렀던 그 친일 행적을 뼈아프게 뉘우쳤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선생은 그 부끄러운 친일 동시를 썼던 몇 해 동안의 죄를 갚기 위해 그 뒤로 (그 몇 해란 10배나 되는 세월을) 한평생을 우리 어린이와 겨레를 살리기 위한 작품을 써서 남기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오덕 (아동문학가)

지원병을 보내며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여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 틈에서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 소리는 하늘에 찼네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반도의 빛』 1942년 8월호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원수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농작물 공출 때문에 식량 부족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 못지않게 심했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변절하는 문인들이 생기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들이 못 나오게 되어 갔다. 내 시를 발표할 곳도 없어졌다.
농민들은 식량을 공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력 공출도 해야 했다. 이른바 '보국대'라 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만드는 공장이나 탄광에 끌려갔다. 지원병이란 이름 아래 젊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한 번 간 삶은 예정한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예사였다. 그 무렵의 내 동시도 슬플 수밖에 없었다.

"개나리꽃 들여다보면 눈이 부시네/노란빛이 햇볕처럼 눈이 부시네./잔등이 후꾼후꾼 땀이 배인다./아가, 아가, 내려라. 꽃 따주께.
아빠가 가실 때는 눈이 왔는데/보국대 보국대, 언제 마치나?/오늘은 오시는가 기다리면서/정거장 울타리의 꽃만 꺾었다." (<개나리꽃>)

강제로 끌려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딸들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었지만 이런 시나마 쓰지 않고서는 내 울분과 적막감을 누를 길이 없었다.
내가 함안읍에서 가야면으로 옮아왔을 때는 전쟁이 점차로 가열되어 한동안 보류되었던 금융 조합 직원도 보국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큰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우리말 우리글을 쓰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는 내 동시들을 모아 붙인 공책을 국어책으로 삼아, '뒷산 부엉이 부엉부엉 운다/동무 동무 없다고 부엉부엉 운다' 같은 것을 읽어 주곤 했다.
가야에서 나는 젊은 청년들과 가까워졌다.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강요에 시달리고 징용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들은, 그 지독한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고도 내게서 무슨 시원한 말이라도 듣고 싶어했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그런 시대였다. 그런 공기 속에서 젊은이들의 눈이 빛나고 핏대가 서는 걸 보고 든든해했을 따름이었다. 나는 밤이면 그들과 수리 조합 둑에 모여 앉아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그 젊은이들이 다 어디로 가서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는 그 중의 한 사람을 면해 전에 만난 적이 있을 뿐이다.
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에 나는 그 가야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요행히 노무 동원에 끌려가지 않고 그날을 맞이했던 것은 나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해방을 맞았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 분자의 하나로 남들에게 보였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디 살아 있을 수조차도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많던 충성스럽던 친일 인사들이 어떻게 우리 민족으로 돌아올지 궁금했다.
급한 대로 나는 지방 자치위원회를 만들고, 한글 강습회를 열고, 강연회를 갖고 하는 어수선한 일을 하다가 그해 가을에 시골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곳에 계속해서 있다가는 문학이란 꿈만 꾸다가 죽도록 금융 조합의 직원 노릇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해가 다 차기 전에 다시 출판사로 일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뒤에도 나는 우리 민족에게 닥치던 가지가지 어려움과 아픔과 죽음들을 당하는 것을 겪고, 보면서 문학이 가질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특히 아동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길은 더욱더 어려운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기도 했다. 지금 사회 구성원이기보다는 앞으로의 사회인이 될 이들에게 주어질 문학이니 말이다. 아동을 상대로 하는 문학, 곧 아동 문학을 동심 문학이라 하는 것, 거기 관련해서 아동을 천사로 보는 천사주의 문학이라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비판도 필요했다. 해방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짐작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시만으로써는 도저히 내 가슴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나타낼 재주가 없어 해방된 두 해 뒤부터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첫 번 장편이 일천구백사십칠년의 숲속 나라와 〈오월의 노래>였다. 앞의 것은 천진한 아이들이 외세를 배격하며 밝은 나라를 건설하는 얘기이고 뒤의 것은 제국주의 일본 시대에 수난받은 아이들의 얘기였다.
아무튼 일흔이 된 이 나이까지 쓴 내 작품이 모두 이런 것이라 내 길은 여전히 가시밭길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길을 버리지 않고 지켜 온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털어놓고 하는 말 · 2/ 뿌리 깊은 나무> 에서

이원수 친일시를 둘러싼 논쟁

원종찬

우리에게 '고향의 봄'으로 친숙한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이 일제 말에 친일시를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선생을 존경해온 많은 이들에게 실망 또는 배신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문제를 두고 어린이 책 관련 홈페이지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이지기도 했다. 이원수를 친일파로 볼 것이냐, 아니면 친일시 몇 편을 썼어도 친일파와는 구별해야 할 것이냐? 이원수 문학 전체를 거짓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한때의 과오로 볼 것이냐? 선생이 일제에 적극 협조한 친일파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문제는 선을 명확히 그을 수 없는 것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보지만, 설마 이원수 문학 전체를 거짓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나왔다. 그것도 선생을 오랫동안 존경해왔다는 이들로부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한참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이원수 선생을 존경하는 건 단순히 칠천만 겨레가 즐겨 부르는 '고향의 봄' 노랫말 지은이라서가 아니다. 한평생 아동문학에 몸을 바쳤다고 해서도 아니다. 우리 아동문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일제 시대와 분단 시대의 지배 권력이 부당하게 짓누르고 깎아내린 민족 아동문학의 논리를 일으켜세우고, 고통받는 서민 아동을 위한 창작활동을 펼치고자 선생이 얼마나 힘겹게 싸워왔는지 모르지 않는다. 선생은 동시, 동화, 동극, 평론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서 민족 아동문학의 지향을 뚜렷이 드러낸 수많은 명편들을 남겼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에게 '이원수' 하면 그저 '고향의 봄'으로 기억되기 일쑤다. 선생이 바로잡고자 애쓴 그릇된 생각, 곧 아동문학은 어린이가 재롱 떠는 모습이나 그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 통념의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의 아동문학을 제대로 이어가는 일은 아직도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다. 이 땅의 아동문학을 참되게 일구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원수라는 이름은 단지 존경의 차원이 아니라, 그 올곧은 정신을 이어받고 되살려야 하는 중요한 문학 전통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조차도 일제 말에 지원병 격려시를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충격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믿음이 강할수록 실망도 큰 법이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이원수 선생이? 이런 마음이 컸을 게다. 나는 선생에 대한 배신감의 토로를 그렇게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논쟁의 과정을 지켜보자니 한때의 감정에 휘둘려서 민족 아동문학의 역사가 혼란 속에 표류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아니 들 수 없었다. 예컨대 '가증스러운 기회주의자 이원수'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 내가 알기로 민족 아동문학을 지향하는 젊은 작가도 있었다. 이런 표현에 의문을 제기하니까 다른 이로부터 '친일잔당'이라는 비판이 또 나왔다. 선생에 대한 실망을 넘은 배신감은 마침내 일정한 논리에 실려 민족 아동문학의 내용과 방향을 흔들어 놓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의 논리는 선생이 의심의 여지없이 친일파라는 규정, 그리고 일제 말이 아닌 다른 시기의 문학도 모두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 위에 서 있다. 친일파 규정을 친일작품의 많고 적음이라는 양으로 따질 계제가 아니라는 지적은 일리가 없지 않지만, 선생의 삶과 문학을 통째로 부정하겠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지나치다. 아마, 선생이 나중에라도 자신의 과오를 드러내고 반성했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침묵했으니 이를 적극적인 은폐로 봐야 한다는 관점인 것 같다. 과오를 숨기고 이룬 문학이 어떻게 진실할 수 있느냐는 것이겠다. 다 알다시피 우리 사회는 일제 잔재를 한번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불행한 역사를 끌어안고 있는 탓에, 오늘날까지 여러 고질적인 문제를 이어가고 있다. 선생의 문학에 대한 전면 부정은 이런 사실을 중시하려는 데에서 비롯한 충심일 거라고 일단 해석하고 싶다.

그런데 이번 논쟁은 역사, 현실, 문학, 삶 등과 이어진 문제에서 뜻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선생의 삶과 문학을 소중하게 여겨온 이유가 무엇보다 폭력과 왜곡이 판치는 역사를 청산하고자 하는 지향이었다면, 마땅히 이성에 바탕을 둔 신중한 표현으로 논의를 펼쳐야 옳다. 생각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남기고 판 자체가 결딴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기 판단을 드러내고 제안하는 일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자기와 똑같지 아니한 의견을 섣불리 윤리적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논의의 틀 자체를 망가뜨린다.

만일에 모든 일을 비타협 근본주의로 풀어가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라면(나는 이런 사람도 존경한다), 그것대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동요 '고향의 봄'은 친일 행적이 널리 알려진 홍난파가 작곡한 노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자고 주장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남북 이산가족이 함께 부둥켜안고 '고향의 봄'을 부르는 현상에 대해 정신나간 일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는지? 아동문학가 이주홍 역시 일제 말의 얼룩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그의 문학도 모조리 매장하자고 주장할 텐가? 송영, 한설야, 임화, 박태원, 김정한 등 다른 일반 문학 쪽의 민족문학 유산에 대한 태도는? 나는 이원수 문학 전체를 부정함으로써 신념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모두 일관된 태도를 지녀왔는지 궁금하다. 이원수 선생만은 배신감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개인 소신의 문제다. 자기와 판단이 다르다고 대뜸 '친일잔당'이라 매도하는 건, 개인 소신을 함께 이행해야 할 책무인 양 강요하는 매우 독선적인 태도다.

순간순간의 달뜬 감정을 이성의 논리로 여기게 되면 양극단을 오가는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그만큼 쉬워진다. 순도 백 프로의 증류수 같은 마음은 기실 관념의 화학반응이 아니라면 나오기 어렵다. 아동문학인 가운데에는 친일문학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큰소리치면서도 분단 시대의 반공문학을 열심히 비호하는 그릇된 지배 관념의 소유자가 적지 않다. 아니, 그쪽이 더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나는 이원수 선생이 일제 말의 과오를 고백하지 못한 사정을 두고는 선생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오덕 선생의 생각이 맞으리라고 본다.(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002년 11월호 참조) 이 땅 아이들에게 주는 글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자 여러 정황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는 말씀이다. 갖은 모함이 난무하는 속에서 분단 이데올로기와 싸움을 벌여야 했던 이원수 선생과 이오오덕이다.

많은 이들이 증언하듯이 이원수 선생은 잘 먹고 잘사는 양지쪽보다는 헐벗고 굶주린 음지의 삶을 부둥켜안고 살았다. 비록 한때의 얼룩을 피해가지 못해 아쉬움을 주고 있어도, '동원'이라는 호가 가리키듯, 겨울처럼 엄혹한 민족 현실을 늘 마주하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누구는 선생의 과오가 밝혀졌는데도 변함 없이 존경하는 건 일종의 줄서기가 아니냐고 꼬집는다.
문단의 해바라기? 외려 그 반대겠지. 이원수 선생의 문학을 제대로 이어가겠다는 다짐은, 저 또한 의로움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음지나 겨울의 삶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지금 당장 배신감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내 말이 이원수 친일시를 비호하기 위한 한낱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일본의 한국 아동문학 연구자인 나까무라 오사무(仲村) 씨가 이원수 친일시를 찾아냈다고 첫 소식을 전해왔을 적에 곧바로 그 자료를 공개하자고 제의한 바 있다. 경남대 박태일 교수가 이원수 친일시를 공개한 뒤로, '이원수 문학기념관' 측이 그 자료를 전시하여 한때의 과오를 남김없이 드러내자고 결정한 것도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원수 문학 정신을 옳게 이어 나가려면 그런 서글픈 역사의 궤적도 함께 드러내어 뼈아픈 경계로 삼아야 마땅한 것이다.

이제는 이원수 친일시를 둘러싼 논쟁이 개인 감정에 치우친 갑론을박이 아니라 진지한 역사적 · 문학적 성찰로 나아가게 되기를 기대한다. 쪽박 깨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일제 말을 제외한 시기에 선생이 보여준 훌륭한 삶과 문학을 제대로 보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나, 일제 말의 친일시를 보고서 배신감을 참을 수 없어하는 마음이나, 모두 역사에 대한 높고 의로운 뜻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 텐가. 이번 친일시 공개로 말미암아 새롭게 떠오른 이원수 문학에 대한 판단이 어떠하든, 의로움을 위한 마음은 결국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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